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전도사 시절 === 구필 화랑을 그만둔 후 고흐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고흐는 영국에서 교사 일자리를 구하다가 램스게이트라는 곳의 학교에서 무급 교사로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램스게이트의 학교는 고흐에게 실망감만을 안겨주었고 고흐는 보조목사나 런던의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 데서도 퇴짜를 맞다가 고흐의 일생에서 그를 이해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영국 감리회 소속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 목사를 만나서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존스 목사는 자신이 순회하던 감리교회에서 고흐가 설교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이때 고흐는 안정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잘하면 목사가 되어서 자신의 생각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고흐에게 [[조울증]]이 찾아왔다. 결국 이 때문에 잘해나가던 보조 목사직도 그만두고 다시 네덜란드의 가족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아들이 광신적인 목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다시금 형 센트에게 도움을 구해서 센트는 빈센트를 위해 [[로테르담]] 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브라트에게 부탁해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하지만 그 일마저도 흥미가 사라지면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서점 일에서 쫓겨난 것으로 빈센트와 큰아버지 센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고흐의 나이로는 목사수업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 데다가 목사고시까지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고흐가 고집을 꺾지 않자 결국 아버지는 고흐의 이모부인 암스테르담의 요하너스 스트리커르(Johannes Stricker, 1816–1886) 목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스트리커르는 조카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인맥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를 붙여서 고흐가 목사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목사의 딸인 코르넬리아 보스스트리커르(Cornelia Vos-Stricker)[* 케이 보스스트리커르(Kee Vos-Stricker)라고도 불린다.]에게 빈센트가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정신적 혼란이 일어났고 시험준비도 끝장나고 말았다. 그가 전에 근무하던 화상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이에게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도 그런 전도보다는 실질적으로 전도에는 불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래야만 성직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에 진저리를 내서 일부러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합격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빠져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일례로 고흐는 그의 가정교사는 별 문제가 없다고 봤음에도 굳이 스스로의 라틴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차마 신학대가 바리사이파 양성소라 싫다고 할 순 없었지, 내가 그깟 라틴어 갖고 애먹을 리가 있니?'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다시 아버지가 나서서 벨기에의 공업지대나 탄광지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단체에 전도사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고흐를 조수 목사로 쓴 적이 있던 존스 목사가 아버지와 함께 나서서 브뤼셀에 있는 선교단체에서 전도사 양성학교에 빈센트를 입학시켰다. 그곳에서는 전도사를 양성해 벨기에의 악명 높은 탄광지대인 보리나주(Borinage)로 파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고흐가 목사의 아들인 탓에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선교단체에서는 결국 고흐를 탄광에서 무급 조수로 쓰기로 결정했다. 보리나주에서 고흐는 탄광의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광부들처럼 극단적인 세계로 밀어넣었다'''. 이런 극단적인 고행은 한편으로는 고흐의 내부에서 신앙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광부들에게 헌신하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극단적 고행 등으로 고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고흐는 전도사로 부적절하다고 보고를 올렸다. 선교단체에서 해고당한 고흐는 중재를 부탁하려고 브뤼셀까지 걸어서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 그 목사는 고흐가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목적에서 성직의 길을 계속 가고 싶다면 보리나주로 돌아가서 무급으로 조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선교단체에서 다시 일을 맡겨줄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보리나주로 돌아간 고흐는 이제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리나주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적인 훈련이 부족한 탓에 그것이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미술을 하겠다는 열의가 강해져 결국 고흐는 만 27세이던 1880년 10월,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